[칼럼] ‘대기업’이 꿈인 사회
‘대기업’이 꿈인 사회
대학을 정할 때 먼저 대학의 간판을 보고 더 크고 화려한 간판을 고른 다음에 과를 선택했다. 우리 형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사실 고등학생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학이라는 갈림길에서 장래와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
나는 어느 대학을 갈지, 무슨 과를 갈지 까지도 아버지가 정해주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때까지 줄곧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아왔는데, 갑자기 앞으로 뭘 할 건지 진로를 선택하려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정해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일까. 나에겐 대학을 가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다. 용기를 내어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엄포를 놓으며 겁을 주었다.
요즘 대학도 안 나오면 결혼도 힘들고 취직도 못해!
무서웠다. 친구들도 모두들 대학에 갈 거라고 했다. 꼭 가야만할 것 같았다. 남들 다 가는데 나 혼자만 가지 않으면 왠지 남보다 뒤쳐질 것 같은 걱정도 들었다. 그래, 아버지 말대로 일단은 가자. 대학생이 되면 여러 가지 선택권이 있고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지방의 한 대학에 취업이 잘 된다는 환경과에 합격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자기소개와 함께 우리 과에 지원하게 된 동기를 발표하라고 했다. 과의 학생들이 모두 모여 있고 한명씩 차례로 나가서 발표하는데, 다들 태어날 때부터 지구와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해결방안을 고민하던 것처럼 휘황찬란한 말들로 동기와 각오를 발표했다. 그러다 내 차례가 되었다.
저는 아버지가 여기가 취업이 잘 된다고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일제히 ‘쟤 뭐야?’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나를 쳐다봤다. 바보 같은 소리인줄 알지만 그럴듯하게 꾸미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4개월 정도 지났다. 슬슬 대학이 고등학교의 연장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대기업에 취직했던 선배들은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성공한 사회인 마냥 입사에 필요한 스펙과 노하우 등을 가르쳤고, 교수님은 학점과 스펙, 토익 등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설명해 주었다.
내 눈엔 강의실 안의 학생들이 모두 대기업에 가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같아 보였다. 대학을 가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경험을 하고 폭넓은 사고를 하면서 자신의 진로와 적성을 선택하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교수님들은 대기업에 가는 방법을 설명하고, 학생들도 대기업에 가기 위해 스펙 쌓고 자격증을 따고 인턴 경험을 쌓았다. 마치 대학이 기업의 하청업체 같았다. 모두가 대기업을 꿈꾸며 대기업에 맞춰진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함은 더욱 커졌다.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 쌓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취직하면 나의 공허함을 달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에 들어가 사회의 톱니바퀴가 되면 행복할까?
더 이상 듣고 싶은 수업도, 가고 싶은 강의실도 없었다. 결국 입학한 지 4개월 만에 대학교 문을 나왔다. 날 보며 누군가는 잘 한 일이다, 스무 살을 뭘 해도 될 나이라고 격려를 해주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아버지처럼 요즘 대학도 못 나오면 결혼도 힘들고 취직도 못 한다며 겁을 주기도 했다. 사실 겁주는 쪽이 훨씬 많았지만, 부모의 기대나 주위 사람들의 시선만으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인정하기엔 부족했다. 더 늦기 전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청년들에게 “공무원이 최고다.”, “대기업에 취직해라.”는 말씀을 자주 해주신다. 공무원과 대기업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모두가 그쪽으로 머리를 들이밀다가 낙오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패배자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의 기대나 사회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기준과 정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저 내 의지에 따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스스로 계획하고 선택하며 결정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스스로 진로를 정하고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경험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대학도 고등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왜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을까? 세상을 부모의 기대대로 사는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더 늦기 전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