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만 골라다녔는데도 덥다.

인도네시아의 3~4월은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건기 우기에 관계없이

날씨의 변동폭이 심해 일기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한다.

다행히 오전 내내 비가 오지 않아 우리의 안쫄(Ancol) 순례는 순조로왔다.

그런데...

좋은 경치와 이색적인 풍경을 만나도 어김없이 밀려오는 갈증과 허기.

그래서 날카로운 시각과 후각을 동원하여 찾아봤다.

가장 인도네시아적이며 가장 현지인들이 먹을 것 같은 음식을.

자바섬에 상륙하고 맞이하는 첫 외식!

푸르른 녹음과 온갖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틈틈히 스며들어오는 자바해의 해조음.

그것은 봄의 들머리에서 이제 막 달려온 나그네에겐 지극히 낯선 풍경이다.

그리고 그런 생경함 속에서도 결코 식을 줄 모르는 왕성한 식욕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또한 살아있다는 완벽한 이유였으니...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깨끗해 보이는 집을 발견했다.

집 나와서 배고픈 이방인은 이런 곳에서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우리가 좌정한 곳은 당연히 싱그러운 숲향이 내리쬐는 야외 테이블.

가게이름이 SOTO BETAWI (소토 버타위)이다.

인도네시아식 곰탕 이름.

생각보다 느끼하지 않고 매콤하게 먹을 수 있는 국물음식인데... 

소년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달려나와 

냉큼 그림있는 메뉴판을 유독 내게만 권하면서 하는 말이,

"노나~!"

너, 지금 나한테 놀고 있냐고 물었니?

그럼 평일날 바닷가에서 이러고 있는 게 니 눈엔 일하는 것으로 보여?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청년을 쳐다보니,

지인의 말씀인즉,

노나(Nona)는 젊은 여성을 높여 부르는 인도네시아 호칭이란다.

보다 늙은 여자는 '뇨냐'라고 부른다고.

묘한 발음의 근소한 차이로 젊고 늙음을 구분한 그들의 의도가 궁금하다.

미세한 발음의 차이로 노소를 구분하는 게 또 있다.

'음박'은 젊은 사람을, '음바'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부르는 말.

아무튼 나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만난 젊디 젊은 청년으로부터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받고야 말았다.

오늘 이 집 매상은 내가 책임질겨~!

그리하여 그림판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닥치는대로 주문했는데...

잠시 후 제일 먼저 나온 아얌 바카르 (Ayam bakar).

아얌(ayam)은이 닭, 바카르(bakar)는 굽다,

즉 구운 닭고기이다.

어쩐지 싸다 했더니, 닭다리 하나만 달랑~

할수없이 아얌 바카르는 사람 수대로 다시 주문!

이어서 소토미 (Soto Mie)가 나왔다.

소토는(Soto)는 국, 미(Mie)는 쌀,

그래서 소토미는 쌀로 만든 물국수다.

1500원짜리 국수치고는 내용물이 꽤 푸짐한 편!

다음은 내가 주문한 나시고랭(Nasi Goreng)이 나왔다.

나시(Nasi)가 밥, 고랭(Goreng)은 볶음.

즉 나시고랭은 인도네시아식 볶은밥이다.

요즘 우리 나라에도 들어와 젊은 층을 상대로 성업중인 아이템.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쌀을 주식으로 한다.

우리와 다른 점은 

우리는 일본종인 자포니카종의 쌀을 먹고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대부분은 인디카종인 이른바 안남미를 먹는다.

2년에 5모작이 가능한 인도네시아는 1980년대 들어서 쌀 수출국이 되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대부분의 집밥은 흰쌀밥 (나시 뿌띠)를 먹지만,

잔치가 있거나 특별한 날에는 꾸닝(카레에 쓰는 강황)을 첨가한

노란색 밥을 먹기도 한다고.

볶음밥임에도 전혀 기름지지 않다는 것이 놀라운데...

맛도 기가 막힌다.

하긴 내 입맛에 기가 막히지 않는 밥이 있기나 할까마는.

인디카종의 쌀은 우리네 자포니카종의 쌀같은 찰기가 없다.

그래서 쉽게 식는 까닭에 손으로 뭉쳐가며 먹기에 편리하고

또한 볶기에도 편리하다.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나시고렝의 대부분의 쌀도 안남미를 수입하여 사용한다.

우리나라 쌀을 이용한 나시고렝은 실제로 본래의 그 맛이 없다.

팁 하나.

안남미를 사용하여 밥을 제대로 짓기 위해서는

밥물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넣고 끓이다가

어느 정도 끓고 나면 그 밥물을 다 부어버리고 

다시 뜸을 들이듯 한소끔 더 잔불로 끓여줘야 제 맛을 낼 수 있다.

나시고렝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명실공히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닭고기를 미리 썰어 양념해 두었다가

기름을 두르고 볶은 다음,

각종 향신료를 추가해 밥과 같이 다시 볶아내는데,

이 맛의 포인트는 인도네시아 특유의 새우 젓갈에 있다.

여느 볶음밥과는 다른 이 나라 나시고렝만의 특징!

밥 위에 과자 같은 것을 얹어주는데...

이곳 사람들은 '끄루뿍(krupuk)이라고 부르며

과자라기 보다는 식사, 즉 밥의 일부로 간주한다.

그 재료도 채소, 해산물, 곡류 등 다양하다고.

밥을 먹을 때 끄루뿍을 곁들이면

치아에 음식물이 끼지 않는 효과가 있다.

추가로 주문한 아얌 바카르가 나왔다.

노릇노릇 그 향기에 탄성을 질렀더니,

우리의 지인께서 또 한마디 하신다.

"오랑 깜풍!! (촌놈 같으니라구~)"

인도네시아인들의 닭사랑은 그 도가 넘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잘 것 없거나 하찮은 존재를 말할 때

'개~'라는 접두어를 곧잘 붙인다.

이를테면 '개차반'. '개떡', '개망신' 등 많은 어휘들이 머리 맡에 '개'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여기 인도네시아에서는 그 역할을 '닭'이 대신하고 있다.

'닭죽음(mati ayam)은 우리말 '개죽음'이고

대책없는 악필을 두고는 '닭발필체'라고 한다.

이렇듯 닭이 인간과 결부되어서 좋은 의미를 갖는게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닭사랑만큼은 가히 절대적이다.

조류 독감이 기승을 부려도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눈도 꿈쩍 않는다고.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는 무슬림의 율법도 한 몫 했겠지만

비싼 소고기에 비해 저렴하고도 손쉬운 닭고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도네시아 대표 음식!

덕분에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업체인 맥도날드도 인도네시아에서는

KFC 같은 치킨 업체에 아직까지도 무릎을 꿇고 있다는 전언.

아얌 바카르는 곁들여져 나오는 소스는 '삼발 소스'로 제법 맵다.

아얌바카르를 이 소스에 찍어먹으면

그 맛이 더욱 환상적인데,

매콤한 이 소스가 고기의 느끼함은 확 잡아준다.

이 소스의 매운 정도가 양에 차지 않는다면

인도네시아 특유의 작고 매운 고추,

'짜베라윗'에 도전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

엄청나게 작은 이 고추의 매운 정도는

우리네 청양 고추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

권장은 하지만 입안에서 발생하는 화재는 절대 책임질 수 없다는...

 
그렇게 나시고랭 하나와 아얌바카르 하나를 시켜 먹어도 

우리돈으로 불과 3000원.

세 사람이 푸짐하게 먹은 돈이 모두 합쳐 10,000원이 안 된다.

어쩌다보니 1인당 2인분씩 주문한 셈이었는데,

어쩐지 주문받는 깡마른 인도네시아 아이가

우리를 보는 시선이 좀 그렇더라니...

거기, 비쩍 마르고 숏다리 장착한 총각~!

시방 우리를 오랑 바비 (orang babi-돼지)로 본겨~?